구텐베르크의 업적은 활자 설계, 활자 대량 생산 기술을 유럽에 전파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업적은 이런 기술과 유성 잉크, 목판 인쇄기 사용을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활자 제작 재료로 합금을 사용하고, 활자 제작 방식으로 주조를 채용하였다.
영국 엑슬리에서 만든 구텐베르크 전기에 의하면, 구텐베르크는 1397년 아니면 1398년에 마인츠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집안은 하급 귀족으로 마인츠를 지배하는 대주교 밑에서 돈을 찍어내는 금속 세공 관리로 일했기 때문에, 구텐베르크는 주물, 압축 등의 금속 세공 기술과 지식을 익혔다. 당시 유럽에서는 교회와 세속 권력 간의 헤게모니 다툼이 있었는데, 다툼에서 지면 추방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의 마인츠 입성 후, 구텐베르크의 부친도 시민들에 의해 추방되어 슈트라스부르크에 망명하였다.(1411년) 1428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슈트라스부르크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전기 작가들은 그의 직업을 상인, 장인 등으로 추정한다. 다시 금속 활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1444년경 귀향하였다.1448년 마인츠에 인쇄소를 개업한 그는 가톨릭교회의 면죄부를 찍어 팔았다.[1] 이후, 고딕 활자를 사용하여 최초로 36행의 라틴어 성서, 즉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하였다. 1453년경 다시 보다 작고 발전된 활자로 개량한 후, 2회에 걸쳐 42행의 구약 성서를 인쇄하였는데, 이 책에서 나타난 우수한 인쇄 품질로 그는 호평을 받았으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2]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대사 판매를 비판하기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문에 붙였다. 이 글은 활판 인쇄술에 의해 대량으로 인쇄되어 두 주 만에 독일 전역에,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대사를 비판하는 논리를 널리 퍼트려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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